삼각지 역 환승통로에는 작은 낭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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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지 역 4호선과 6호선 사이에 있는 환승통로는 매우 길다. 평일 출근길에는 역에 도착한 4호선 열차를 타기 위한 직장인들의 100m 달리기가 펼쳐지는 곳이다. 퇴근길에도 다닥다닥 붙어 이동할 만큼 사람들이 많다.
- 그런데 최근 이 구간의 한구석 모퉁이에 이상한 게 생겼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만 해도 바쁜 이 공간에 말이다. 바로 꽃집이다. 도시 생활의 팍팍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이곳에 뜬금없이 꽃집이 들어섰다.
- 정확히 얘기하면 꽃을 팔기 위해 놓아둔 이동식 매대다. 꽃 가판대 같은 느낌. 매대가 크지도 않고, 꽃의 종류가 많지도 않다. 그래도 꽃을 판다. 출근할 때마다 이동식 매대에 붙어 있는 '꽃다발 삼 천 원'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 꽃다발이 삼천 원이라니. 물론 가격이 삼천 원부터 시작하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팔아서 돈이 얼마나 남을까라는 생각이 출근할 때마다 든다. 그리고 누가 이 지하철 모퉁이에서 꽃을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근데 웃기게도 출근할 때마다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 누군가는 나였다. 꽃들을 가볍게 구경하고, 적절한 꽃 몇 송이를 사서 퇴근 후에 만날 여자친구에게 갖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만약 출근길에 심적 여유가 있었다면 구경했을 것 같다. (아직까지는 출근길에 심적 여유가 있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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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토요일에 회사를 가게 되었는데, 주말에도 환승 구간에 놓여있는 꽃 매대를 보았다. 주말에도 영업을 하시는 사장님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만 하고 평일 출근 습관처럼 지나가려다가 문득 멈춰 섰다.
- 매대 앞에 서서 자세히 살펴보니 삼천 원짜리는 거의 없고, (안개 꽃 하나?) 다 8-9천 원으로 가격표가 붙어있다 (아 낚인 건가 싶었다). 물론 저렴하긴 했다. 혹시나 해서 사장님께 여쭤보니 장미 한 송이를 추천해 주셨다. 5천 원에 주신다고 했다.
- 여자 사장님은 지하철 역사가 추우셨는지 목도리와 모자로 꽁꽁 싸매고 계셨다. 그럼에도 사장님의 서비스는 따뜻했다. 비록 꽃 한송이었지만, 제일 괜찮은 상태의 장미로 골라 주시려고 노력해 주셨다.
- 찬찬히 보니 책도 같이 판매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매대에 이름이 The Book & Flower로 붙어 있었구나. 지하철 환승통로라는 공간만 아니었다면 여느 플라워 카페 같은 네이밍이 되었을 텐데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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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꽃을 샀다. 평일 출근길이었으면 앞으로도 계속 지나쳤을 꽃을. 팍팍한 평일에는 갖기 힘들었던 낭만을, 여유로운 주말이 되어서야 갖게 되었다. 여유가 만든 삼각지역의 작은 낭만이었다. 같은 장소라도 상황과 내 마음에 따라 살기 팍팍한 공간이 되기도 하고, 낭만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삼각지 역에서 챙긴 이 작은 낭만을 여자친구에게 갖다 줄 일만 남았다.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산 줄은 모르겠지.)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렇게 못나지도 않았다. 내가 혹시 여자친구와의 약속시간에 조금 늦는다면, 그 기분을 풀어줄 정도는 될 것이다. 내가 늦지 않는다면, 이 날 저녁은 소소한 행복이 가득한 시간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