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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핑크색 아식스 운동화

망고스틴. 2022. 9. 1. 19:18

1. 이른 아침 나는 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옥신각신하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어머니, 이제 이 운동화 좀 버리세요~" "아니다, 버리긴 뭘 버려, 가방에 넣어다오."



2. 우리 집은 부모님과 나 세 식구가 사는 집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집은 친할머니 소유의 집이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전라도에서 상경해 서울에서 자식들 키우며 서울 생활을 하시다가 20년 전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귀촌을 한 것이다.



3. 다만 시골에는 서울만큼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터라, 지병을 갖고 계신 할머니는 분기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 진료를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 집으로 올라오신다. 이번 주에도 할머니는 병원 진료 때문에 우리 집에 3일 정도 머물러 계셨다.



4. 할머니가 올라오실 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새로 사드리곤 했다. 옷이나 내복 같은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그 품목이 신발이었다. 할머니가 평소에 신고 다니는 운동화를 새것으로 바꿔드린 것이다.



5. 할머니는 핑크색 아식스 운동화를 신고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 핑크색 아식스는 아주 오래된 운동화였다. 하도 오래 신어서 운동화의 밑창이 닳고 닳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 핑크색 아식스는 운동화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은퇴를 해도 진작에 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6. 부모님은 그런 할머니의 신발이 안쓰러우셨는지 러닝화 매장을 하는 외삼촌의 매장에서 비싼 트레일 운동화 하나를 얻어 오셨다. 혹시나 사이즈가 안 맞을까 봐 다른 사이즈로 하나 더 갖고 오기도 했다.



7. 할머니가 다시 시골로 내려가는 당일 아침,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새로운 신발을 선물해 드렸다. 할머니는 당연히 매우 기뻐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번에 신고 오신 아식스 운동화는 밑창이 다 닳았으니 버리자고 했다. 새 운동화를 신고 가시라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걸 왜 버리냐며 극구 반대하셨다.



8. 어머니와 아버지는 할머니를 재차 설득했다. 운동화 밑창이 다 닳으면 미끄럽고 위험할 수 있으니 그만 버리자고. 그래도 할머니는 완강하다. 이 신발을 신고 그동안 논에도 가고, 밭에도 잘만 갔다고, 그냥 가방에 담아주라는 것이다. 부모님이 답답해하며 다시 말을 꺼내보지만, 할머니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9. 이런 실랑이를 나는 새벽부터 듣고 있자니 더 이상 잠을 계속 잘 수는 없었다. 그냥 일어나서 할머니께 비몽사몽 아침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고속 터미널로 향하셨다.



10.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할머니와 부모님 간의 운동화 실랑이 사운드가 문득 머릿속에서 복기가 됐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래된 운동화에 집착하셨을까. 어머니 말로는 그 운동화는 10년도 더 된 거라고 했다. 그러게, 할머니는 왜 그걸 안 버리시려고 했을까. 그러다 문득 그렇게 오랫동안 쓴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 운동화에 할머니가 정이 많이 들었을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게 오래 쓴 물건, 옷이 있었다. 그건 바로 검정색 겨울용 점퍼였다.



11. 그 검정색 점퍼는 가을에는 덥고, 한 겨울에는 패딩만큼 따뜻하지 않은 그러니까 뭔가 애매한 계절감의 점퍼다. 그 점퍼를 나는 5년 전, 유럽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많이 입고 다녔다. 안에 기모 후드티와 히트텍을 꾸역꾸역 입고 다니면서 말이다. 그 점퍼는 그래도 내구성이 좋고 디자인이 무난해 이런저런 때에 막 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점퍼를 입고 유럽 대륙을 누볐다. 그 점퍼와 함께 한 국가만 해도 10곳은 넘을 것이다.



12. 지금도 나는 그 검정 점퍼만 입으면, 유럽 여행을 다니던 때의 추억과 감정이 느껴진다. 그만큼 애정이 깃든 옷이다. 그런데 만약 누가 이 옷을 좀 오래됐다고, 많이 헤졌다고 버리라고 한다면..? 그건 좀 많이 서글플 것 같다.



13. 이런 맥락으로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할머니가 왜 그 핑크색 아식스를 버리기 싫어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의 운동화는 단순한 운동화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 운동화는 나의 검정 점퍼와 같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동반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검정 점퍼를 입고 유럽을 누빈 것처럼 할머니는 그 신발을 신고 따뜻한 봄이나 선선한 가을에나 언제든 나갔을 것이다. 또 시골에서 어디든 갔을 것이다. 그곳이 모내기가 되어있는 넓은 논이든, 고추나 깨가 심어져 있는 풋풋한 밭이든 말이다.



14. 또 할머니의 몸 상태가 좋았을 때나 좋지 않았을 때나 그 운동화는 항상 할머니와 시골에서 이곳저곳 함께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절약에 강하다고 하셨지만, 그 운동화는 할머니에게 단순 절약의 차원을 넘은 특별한 무언가 라고 생각하니 운동화를 버리지 말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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